금나나씨의 네버엔딩스토리

  한때는 고시생이자 현재는 대한민국 육군에서 현역병사로 군복무 중인 나는 진중문고에서 눈에띄는 책을 찾았다.

그책은 바로 이책!!

아마 그녀가 얼굴이 안예뻤다면 이름도 몰랐을테고 책을 읽을 일도 없었을 것이다. 사실 이런 책류를 정말 싫어한다.
전에도 한번 비슷한 글을 올린적이 있다.
어릴 적이나 지금이나 나는 금나나같은 여성이 이상형이었다
예쁘고, 키도 크고, 몸매도 좋다. 거기에 수준급의 지능과 근성까지 갖추고 있으니까 말이다. 
필자같은 경우에는 얼굴이 잘생기지도, 키가 크지도 않다. 거기에 공부에 대한 근성도 별로 없다. 
학벌도 심각하게 달리고.
종합적으로 보면 금나나씨와 나는 클래스가 다르다. 

어쨌든 심심풀이 목적으로 읽어봤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뭐랄까 거품이 잔뜩낀 맥주같은 느낌의 책이었다.
물론 금나나씨가 나보다 여태까지 이룬 업적은 나보다 많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적어도 하버드 학사학위는 가지고 있으니까말이다. 

문제는 그것이 그녀가 가진 '전부'라는 것이다. 

뭐 하버드에 입학했다는 내용만으로도 성공스토리로 추앙받고 베스트셀러가 되는 나라에서
졸업은 엄청난 가치가 있겠지만서도... (참고로 하버드대 4년내 졸업율은 95%를 상회함. 서울대보다 훨씬 높음)

그렇지만 말은 바로 해야한다. 학벌이 중요한 한국 사회에서도 학벌=업적이라는 사고방식은 쫑난지 오래다.
설사 쫑이 안났다고하더라도 쫑을 내야한다. 쫑나 있는게 정상이다.  
도대체 그녀가 대한민국 사회 또는 미국 사회에 기여한 것이 무엇일진데 
그녀가 어린아이 일기장같은 수준의 책을 전철 타블로이드지'일요신문' 기자와 공저를 하는가.
'하버드에서 배운 도전과 열정, 희망의 공식'이라는 손발 오그라드는 부제는 또 무엇인가.

경대 의대 시절에는(물론 경대 의대 간 이유도 '의사'가 되고싶다는 이유가 있었다기보다는 점수따라 갔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거의 모든 수험생들이 하던 것처럼) 하버드 입학만이 목표고, 하버드 입학 후에는 명문 메디컬스쿨가서
의사되는 것이 목표였을 것이다. 특별히 의사가 되고싶은 이유가 있다기보다 공부 좀 한다는 녀석들은 
다 의대진학경쟁에 뛰어드니 자기도 경쟁에서 뒤쳐지고 싶지않아서였을 것이다. 

미국 메디컬 스쿨에서 그녀를 굳이 뽑을 이유가 없었던 것도
그녀의 학업성적이 아주 뛰어나지도 않고, 과외활동이 하버드 입학 후에는 뛰어나지도 않은데다 
인생의 철학이나 소신같은 것도 특별한 것이 없어서였을 것이다. 
물론 이것은 추측이다. 그렇지만 나이가 20살이 넘었음에도 그녀가 그녀의 에쎄이 
과외선생이라는 사람에게 가장 의지했다고 써놓은 것을 보면 
그녀의 철학이 그녀의 엄청난 학벌이나 경력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나이에도 걸맞지않다라는 사실을 대놓고 홍보하는 것으로 해석해도 무방할 것같다. 
적어도 나는  학원선생이라는 사람들을 좋아하지는 않아서
필요에 의해 수업은 들어도 정신적으로 의지하지는 않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웃긴 건 그녀가 이제는 학원선생을 하고계신다는 것이다.
sat 학원 등록비가 수백만원을 호가하는데 거기서 봉사활동한다하시니 의전진학이 목표가 맞는 건지 알 수가 없다.  

그녀도 큰 틀에서 생각하지 못하는 '한국형' 인재에 불과했을 지도 모른다.
 
영어가 안되서 레드불을 마시고 밤을 세워가면서 공부하고, 초콜릿에 중독된 
그녀의 근성은 뭐라그래도 인정해야겠지만
그 정도 근성은 서울대 법대 열람실에만도 수백명이고, 신림동 고시촌에는 수천명
연고대 고시반+CPA반에도 수백명씩 널리고 널려있다. 
그녀가 아니더라도, 고시생이 아니더라도 
금나나씨같이 자신의 목표를 향해 열정을 불태우는 청춘들이 전국에 깔려있다.
(물론 이루려는 목표에 대한 각자 철학의 깊이는 다 다를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그녀에게 돌아간 삼성장학금은 낭비라고 생각한다. 
물론 금나나씨같은 유명인에게 장학금을 수여함으로써 이건희 회장이 공익사업을 한다는 사실을
국민들에게 효과적으로 홍보할 수 있기야 하겠지만 말이다.  

사실 그녀를 비난하고 싶지는 않다. 그녀가 그녀의 이야기로 책을 내는 것은 그녀 자유이기 때문이다. 
다만 비난이 아닌 비판의 눈으로 봐라보아야하는 이유는 
누군가는 그녀를 보고 롤모델로 삼고 꿈을 키우고 있기 때문이다. 
이책이 베스트셀러가 아니고, 독자서평에서 별 2개 정도 받는 책이라면 
내가 굳이 블로그에 쓰레기같은 글을 올릴 이유가 없다. 
이책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추천을 받고, 감동을 받았다는 서평을 보고,
별 다섯 개로 도배되는 현실이 안타깝다. 



 


 
  

by 구글매니아 | 2009/08/11 03:58 | 잡다한 생각들 | 트랙백 | 덧글(13)

나는 풋볼을 좋아하고



단지 풋볼을 하고싶을 뿐이고
우리학교에 풋볼 아는 사람 별로 없는 것 같고
연고대에는 풋볼부 있고
성대홍대중대에도 있고
우리학교는 없고
연고대 갈 껄 그랬고

아놔 미치도록 해보고 싶다...
미국 넘들이 부럽다.
플랙풋볼이라도 해봤으면..
이민이라도 가고 싶다.

by 구글매니아 | 2008/10/11 04:16 | 나에 대하여 | 트랙백 | 덧글(1)

어른이

어른이 된 줄 알았다...
그러나 아직 나는 어린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어른이'다.
내가 살아온 과거를 돌이켜보면
내 자신이 쑥쓰러울 때가 많다.
초등학교 때 어른이 다 된 줄 알았고,
중학교 때 비로소 어른이 된 줄 알았고
고등학교 때 이제 나는 어른이다라는 생각을 했었다.

대학에 와서 보니 초중고 시절은 어른이 아니었다.
대학에 와서야 진정한 어른은 이런 것이라고 느꼈다.
근데 아니다.
적어도 지금 나는 결코 어른이 아니다.
내 안의 순수성은 아직 죽지 않았다.
어른이 다 됐다고 잘난 척하면서 입방정 떨던
기억을 잊고 싶다.

난 아직 멀었다.

by 구글매니아 | 2008/10/01 03:39 | 나에 대하여 | 트랙백 | 덧글(0)

실용성...

실용적으로 살고 싶었다.
어찌보면 김구라와 나는 코드가 맞다...
철저한 현실주의자라는 타이틀...
부끄럽지는 않다.

특이한건 실용성을 꿈꿀수록
감정은 더 예민해진다.
감정없는 냉혈한이 될 수는 없는 건가.
젠장...

by 구글매니아 | 2008/09/11 03:38 | 나에 대하여 | 트랙백 | 덧글(0)

삼성 대 김일성

우선 서양인이 한국의 상징을 마음대로 정했다는 거 자체가 즐거운 일은 아니지... 물론 보수단체의 레드컴플렉스도 웃기는 일이지만... 이 작가가 만든 다른 작품을 보면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메세지를 던지는 작가는 아니다... 그냥 전형적인 포스트모던 아트를 하는 사람인데, 그러다보니 타문화권에 대한 몰이해가 느껴진다.원래 포스트모던아트라는 게 무거운 의미의 '메시지'나 '컨텍스트'를 거부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작가도 이런 경우라고 볼 수 있다. 그의 작품들을 보면 동양 문화에 대한 상당한 판타지를 가지고 있는 작가라는 사실을 알 수 있는데, 기모노를 입은 일본 여성으로 대표되는 일본적 이미지를 좋아하는 전형적인 서구인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서구에 불고 있는 '日流'의 영향을 많이 받은 작가. 타문화권에 대한 몰이해 또는 배려가 부족하다고 볼 수 있는 사례가 이거말거도 독일 사례인데...

독일의 상징으로 메르체데스와 히틀러를 대비시켰만봐도 알 수가 있는게, 독일인들에 '히틀러'에 대한 감정이 어느 정도인 줄 모르고 한 짓이지... 마치 안중근의사를 유영철과 같이 대비시켜놓은 것과 같다. 둘다 살인자지만 의미나 무게감은 분명히 다르다. 메르체데스 벤츠도 분명 독일 회사고, 독일의 상징적인 기업이지만, 히틀러와 대비되는 독일의 멀쩡한 기업과 독일인들의 억장이 무너지는거지... 히틀러와 함께 했던 역사를 다시 쓰지 않으려고하는 사람들인데 말이야...

작품을 분석해봤을 때 결론부터 말하면 컨텍스트나 주제의식을 찾아보기는 힘들다. 우선 이 작가가 뭘 의도하는지 파악할 수 없다. 포스트모던이니 컨텍스트를 찾기보다는 이미지 자체로 이해해야하지만 '분석'이라는 단어자체가 후근대가 아니라 '근대'적인 것이니 분석이 근대적인 시각에서 이뤄질 수 밖에 없다. 갈팡질팡해야한다고하나... 뭔가 누군가를 흉내냈지만 자기것으로 소화하지 못하는... 사회비판적인 메시지를 주려고 한건지 아무 의미가 없는건지 이건 뭐 이도저도 아니다... 사실 이게 포스트모던이라고 불리는 거긴 하다...

어쨌든 작품의 컨텍스트를 분석해보자. 제목은 "삼성 대 김일성"이다...이걸 보면 우선 남북한의 체제경쟁에 대한 메세지를 주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남북한의 체제 경쟁에 결과물이 하나는 최대 재벌 '삼성' 또 하나는 '김일성'이라고 말이다. 그렇지만 텍스트를 보면 그 생각이 틀림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삼성과 김일성을 사랑한다."라는 문구와 함께 배트를 든 돼지 한 마리가 등장한다...문구는 작가가 반어적으로 삼성과 김일성을 풍자할 것이라는 걸 암시해주는 역할을 한다. 여기서 '돼지'는 두가지 함의를 가질 수가 있는데, 첫째는 근대 자본주의 기업가들, 둘째는 스탈린주의자를 둘 수 있다. 문제는 그 무게감이다. '삼성'과 '김일성'의 무게감이 다르다는 거다. 한국인들에 '김일성'에 대한 무게감은 독일인들에게 '히틀러'의 그것과 거의 엇비슷한 정도다... 거기에다가 아무 연관도 안되는 상징물(월트디즈니 캐릭터, 백설공주같은 것)들을 옆에다 갖다 걸어놨으니 컨텍스트 분석이 정말 힘들다...

작품을 딱보면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작품을 같잖게 흉내를 내놨다는 것을 알 수있다. 리코 사키넨이라는 작가의 드로잉과 설치작품들을 보면 리히텐슈타인의 스타일을 따라한게 많이 보인다. 참고로 리히텐슈타인이라는 사람은 홍라희씨가 몇십억을 주고 샀다는 '행복한 눈물'의 작가로 포스트모더니즘의 대표적인 선구자라고 볼 수 있는 사람이고...거기에다가 이 작품말고 다른 작품을 보면 앤디 워홀의 것과 비슷한 드로잉도 많다...어차피 팝아트 쪽에서는 복제가 예술로 인정되기도 하니 흉내는 문제가 없겠지만...ㅎㅎㅎ

그런데 이 작가가 자신의 작품 의도를 말하는 걸 들어보니, 전남대 교수 말처럼 뭐 정치주의와 상업주의를 비판했다고 말하기가 어렵더라. 작가 자체가 그런 의도가 있다고 얘기하지를 않으니... 단지 그냥 자기가 봤을 때, 한국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삼성'이고, 북한하면 떠오르는 것이 '김일성'이라 그려놓은 것이고, 배트를 든 돼지는 미국에서 전파돼서 한국의 가장 인기있는 스포츠과 된 '야구'를 보고 그려놓은 거라고 하니 할 말이 없다. 정치주의와 상업주의에 풍자라고 분석한 교수만 바보꼴 된거지... 정작 작가 자신이 '남한'하면 떠오르는 게 애니콜 만드는 삼성이고, '북한'하면 떠오른게 자신만의 이념, 즉 Juche를 만든 '김일성'이 떠오르고, 한반도의 대표적 스포츠로 '야구'가 떠올랐을 뿐이라는데.ㅎㅎㅎ

by 구글매니아 | 2008/09/05 02:33 | 잡다한 생각들 | 트랙백 | 덧글(0)

7인의 사무라이

 

<7인의 사무라이>는 필자가 좋아하는 감독인 구로사와 아키라의 대표작이다. 존포드 감독의 서부 영화를 보고 감동을 받은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이 미국의 서부극을 일본식으로 번안한 영화가 바로<7인의 사무라이>이다. 이 영화는할리우드에서 <황야의 7>이라는 영화로 재탄생 했는데, 원작의 명성만큼이나 <황야의 7> 역시도훌륭한 영화로 꼽힌다.

 

우선 이 영화에는 약한 사회 집단으로서 어느 농민들의 마을이등장한다. 매년 이 마을에 곡식

을 빼앗아가는 도적들(=악당) 때문에농민들 간의 갈등이 발생한다. 도적들에 맞서 싸워야 한다는 사람과, 싸울수 없다는 사람들과의 갈등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다가 결국 싸우기로 결정하고 굶주린 사무라이를 찾아도시로 떠난다. 하지만 굶주린 사무라이를 찾기가 너무 힘들어서, 마을을구원하러 도시로 간 농부들은 절망에 빠진다. 이때 도둑이 아이를 인질로 잡은 도둑이 등장하고, 어떤 사무라이가 등장한다. 중으로 위장한 후, 주먹밥 2개를 달라고 한 뒤, 범인을유혹해, 그를 베고, 아이를 구출한다. 이 장면을 본 농부들은 그에게 매달리고, 처음에는 그가 거부하나결국 농부들의 불쌍한 처지를 보고 도와주기로 결심한다. 그는 시마다 캄베이, 로닌으로서 겸손하며, 인간적이고,전쟁 경험이 풍부하지만 싸우는 데 지쳐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농부들과 함께, 사무라이를 모집하기 시작하는데, 그의 인간미 때문에 많은 사무라이들이동참을 결심하고, 결국 7인이 모인다. 7인은 마을로 향하지만, 마을 주민들은 그들이 마을 처녀들을 유혹할지도모른다는 생각에 그들을 의심한다. 7인의 사무라이 중 마지막으로 동참한 억압받는 농민을 대표하는 키쿠치요가마을 사람들의 사무라이에 대한 두려움과 의심을 해소시킨다. 결국 사무라이들과, 마을 주민들은 악당들을 몰아내고 승리를 거머쥐며, 마을에는 평화가찾아온다. 그리고 사무라이 중 4명이 사망하고, 남은 3명은 쓸쓸히 이긴건 농민이지 우리들이 아니다.”라는 말과 함께, 동료들의무덤을 보며 쓸쓸히 떠난다.

 

서부 영화의 구조를 완전히 빌린 영화이다. 위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서부 영화의 제 원칙들이 총출동한 영화다. 7인의 사무라이에서 가장 강하게 느낀 것은 바로 계급이다. 웨스턴무비와 다른 점이 있다면 약한 농민들을 구원하는 것이, 단순히 떠돌이 총잡이가 아니라, 일본의 권력 계층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들은 보통의 권력 계층은아니다. 배고픈 권력 계층이다. 일본에서 무사란 계급이 가지는위상은 한국에서 선비 계급이 가지는 위상과 비슷하다.

 

이 영화는 무사 계층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전후 일본에서 사라진 무사도 대한 갈망이 느껴진다. 물론 이 영화가주장하는 武士道란 전체주의 일본의 그 무사도와는 거리가 있다. 한 송이 사쿠라 꽃이 되기 위해, 천황폐하에게 자신의 몸과 마음을바친 가미카제 특공대원들을 기리는 영화가 결코 아니라는 뜻이다. 이 영화에서 武士道란 약자를 보호하는, 상위 계층으로서 의무를 다하는 도덕적인 정신을 뜻한다. 이 영화에등장하는 일본의 상류계층은 민중의 삶이 어떻게 되든 관심이 없었다. 농민 출신의 키쿠치요를 제외한 6인 역시도 마을에 가기 전까지 농민 계급의 비참한 현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 영화는 현재 일본의 상류층들 역시도 이들처럼 도덕성과 책임감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은연중에 드러낸다. 

 

그러나 어찌 보면 바로 이것이 이 영화의 태생적 한계라고 볼수 있다. 진정한 무사도 정신, 즉 상류 계급으로서의 책임에대해 이야기 하고 있지만, 결과적으로는 무사 계급과 농민 계급 간의 숨겨져 있는 갈등을 표면화시키는것보다는, 봉합을 택한다. 농민을 핍박해왔던 사무라이 계급이결국 능력 없고, 약하고, 용기가 없는 농민들을 구하게 된다. 결국 다시 말하면 7인의 사무라이가 등장하여 농민을 악의 무리로부터구원하면서, 역사적으로 지속되어왔던, 농민의 상류계급에 대한불만이 해소되고, 마을에는 평화가 찾아오게 되는 것이다.

 

서부 영화의 특징은 남자들의 로망을 자극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서부 영화의 구조상 한계일수도 있고, 매력일 수도 있다. 이 영화는 분명 매력적인 영화이고, 훌륭한 영화이다. 복잡한 내러티브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야기 전개에 무리가 없고, 배우들의연기도 훌륭하고, 촬영술도 대단하다. 그렇지만 이 영화의사무라이 계급에 대한 로망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는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말이 굉장히 부각되는 시기이기 때문에,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이러한 로망은 훌륭하다고 해석할 수 있다. 반면에, 일부도덕적인 사무라이들의 고군분투를 통해서, 계급간의 갈등이 해소되는 모습에는 선뜻 동조하기 힘들다.   

by 구글매니아 | 2008/07/17 06:07 | 잡다한 생각들 | 트랙백 | 덧글(0)

서부영화 비판

더 이상 미국의서부에서 서부특유의 냄새를 맡기는 힘들다. 서부 영화 속의 서부와그 안의 인간군상들에게서 땀 냄새와 화약 냄새가 느껴진다면, 현대의 서부에서는 향수 냄새와 심한 매연이뒤섞인 냄새만이 느껴질 뿐이다. 물론 요즘의 서부에서는 그때와 다르게 마약 냄새도 많이 난다. 어쨌든 현대의 서부에서 우리가 서부에 대해 막연히 떠올리던 이미지는 거의 완전히 사라졌다.  마이클 만 감독의 영화 <콜래트럴>이 보여주는Los Angeles의 모습은 분명 서부 영화의 그것과는 다르다. 물론 서부 영화가 대량으로생산되던 1940-50년대 미국 서부 역시도 분명 서부 영화 속의 서부와는 분명 다르다.  

 

서부 영화는 대체적으로보면 서부를 개척하는 남성의 남성다운 이미지를 찬양한다. 서부 영화가 활발하게 제작되던 시대는 대체로보면, 남성들의 남성성에 대한 갈망이 최대한으로 끌어올려진 시기라고 보여진다. 1차 세계 대전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서부 영화 장르의 공식이등장했고, 2차 세계 대전과 한국전쟁 시기에 미국 할리우드팩토리 시스템을 대표하는 최고의 공산품이 되었다는 사실은 상당히 의미가 있다. 1940-50년대 전후의미국이 요구하던 시대 정신과 서부의 개척자 정신은 상당부분 일치하고, 결과적으로 서부 영화는 미국인들의선조들이 가지고 있던 불굴의 정신을 현대적으로 부활시키는 역할을 한다. 물론 이후에도 끊임없이, 남성성을 자극하는 영화들은 많이 출시되었지만, 웨스턴 무비처럼 미국적남성의 그것을 강하게 자극하는 장르는 보이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제서부 영화는 지나간 시대의 유행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서부 영화의 전형적인 구조는 더 이상 관객들의흥미를 자극하지 못하며, 개척시대의 서부라는 배경은 너무도 많이 봐왔기 때문에 이제는 지겹기까지 하다. 특히관객들은 서부 영화 특유의 영웅과 선악 구도에 대해서 상투적인 느낌을 많이 받는다. 앞에서 언급한 <콜래트럴>을 봐도 이라고 볼 수 있는 택시기사역의 제이미 폭스는 전혀 영웅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전형적인 미국의 소시민일 뿐이다. 악역을 맡은 탐 크루즈의 최후를 보면서도 전혀 통쾌하지 않으며, 오히려현대인들의 정서적 결핍을 떠올리며, 그를 동정하게 된다. 최근에개봉한 서부 영화인 3:10 to Yuma에서 악역을 맡은 러셀 크로우를 봐도 분명한 선악의 구분은느껴지질 않는다.

 

현대 할리우드영화 속에 등장하는 영웅은, 서부 영화에서처럼, 전형적인어떤 것이 없다. 요즘 미국 영화의 트렌드일 것이다. 본시리즈의 제이슨 본이 현대 할리우드와 관객들이 원하는대표적인 영웅이다. 제이슨 본은 전혀 전형적이지 않다. 정확히말하면, 제이슨 본 자신이 자신을 전형화시키지 못하고 혼란스러워한다.자신에 대한 기억이 없고, 자신의 정체성을 상실한 상태의 본은 그것을 다시 찾기 위한 영웅적투쟁을 시작하고, 관객들은 그의 투쟁을 지지한다.

 

 베트남전 이후로 미국에서는 개척자 정신과 남성성에 대한 꽤 많은 고민을 한 것처럼 보인다. 미국의 60-70년대를 경험해보지 못한 필자의 입장에서는 베트남전은 그리 가슴에 와 닿지 않는다. 단지 몇 가지 기록 영상물과 베트남전 관련 영화에서만 베트남전이 미국인들에게 어떤 의미인지 간접적으로 느낄뿐이다. 아마도 베트남전 패배에 대한 기억과 전쟁에 대한 근본적인 시각의 변화는 근본적으로는 미국적인남성성의 패배와 쇠퇴를 초래하는 결과를 낳았고, 서부 영화의 영광에 종지부를 찍지 않았는지 생각해본다.

by 구글매니아 | 2008/07/17 06:06 | 잡다한 생각들 | 트랙백 | 덧글(0)

◀ 이전 페이지          다음 페이지 ▶